17일차
9.21 (금)
산토 도밍고 -> 벨로라도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날, 우리는 무얼 했느냐.
내 몸상태가 좀 안좋아서 버스를 타고 쭉 이동했다! 오늘은 우리에게도 쉬는 날, 자체 명절이다.
쉬는 날 우리는 일단 평이 좋은 알베르게에서 남이 해주는 음식을 먹기로 했다. 구글맵을 살펴보니 Cuatro cantones 라는 알베르게에 한국인들이 음식 평을 아주 좋게 남겼다. 요 며칠간 계속 해먹기만 해서 오늘만큼은 좀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었다.
한시가 좀 넘어서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그 앞에는 줄이 꽤 길게 늘어져있었다.
레스토랑을 겸하는 알베르게다 보니 음식 맛이 더 기대가 되었다. 입구에는 메뉴판이 있었는데 여태껏 우리가 먹지 못한 메뉴들이 있었다.
주로 아저씨들이 많았는데 오랜 시간 걷고 드디어 안식처를 찾아 기쁜 표정이었다.
우리도 별 힘들이지 않고 버스를 타고 왔지만 기분 좋게 우리 차례를 기다렸다.
접수대에 여자 직원은 프랑스어도 굉장히 유창했다. 혹시나 한국어도 잘 하는거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다보니 우리 차례가 왔다. 6인실 도미토리를 24유로(2인)에, 조식을 10유로에 지불하고, 우리방으로 갔다. 방과 화장실, 샤워실 모두 너무나 깨끗하고 인테리어도 예쁘고 아기자기했다. 어떤 한국인은 순례길 중 최고의 숙소였다고 했는데, 어느정도 이해가 되는 상태였다.
너무 배가 고파, 짐을 풀고 우리 방 바로 옆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갔다. 메뉴판을 보는데 너무 신이 났다. 오빠가 나한테 전적으로 선택권을 주고 나는 고르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메인 요리 중 가장 비싼 마늘 소스로 구운 새우 요리와 감자튀김을 곁들인 등갈비 요리를 시켰다.
내가 급한 마음에 메뉴판을 들고 직원을 찾아가자, 약간 짜증나는 투로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아참! 이 곳은 기다림이 일상인 나라. 내가 너무 성급했다. 좀전에 고른 두가지 음식을 주문하자, 새우는 7분, 고기는 20분이 걸린다고 했다. 새우를 스타트로 해서 고기를 세컨드로 하겠냐고 해서 그러겠다고. 여기는 보통 전채요리와 메인, 디저트 이렇게 3코스로 주로 하기때문에 우리가 시킨 이 주문이 조금 일반적이지 않을거 같다. 디저트도 없이 메인, 메인 이렇게 시킨 거기 때문에.
음식은 너무나 맛있었다. 양도 많았다.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는 어제 뙤양볕을 쬐며, 걷느라 정신 없는 와중에 했던 진지한 이야기를 마처 하기 시작했다. 오빠는 어제 그늘 하나 없이 길게 이어진 메마른 길을 걸으며, 그 길이 너무나 지치고 지루했던지, 뜬금없이 '살면서 이루고 싶은 일이 없냐며' 물었다.
나는 너무 몸이 지치기도 했고 갑자기 너무 오랜만에 듣는 질문이라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
그래서 다시 그 이야기를 소환해와 이야기를 나누고,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가졌다.
마을 구경을 하면서 지도에 동굴같은 특이한 장소가 있어서 가보려고 했는데 알고보니 7키로나 떨어져있어서 포기하고, 마트에 가 요거트를 사먹었다. 나는 다농에서 나온 그릭 요거트가 너무 맛있어서 종류대로 다 사먹고 있고, 오빠는 어제 설탕을 없는 걸로 잘못 사서 실패했던 푸딩을 단 맛으로 다시 샀다.
그리고 이 멋진 알베르게 와 수영잘이 딸린 정원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오빠는 옆에서 이 순례길을 어떻게 완주하면 좋을지, 머리를 쥐어짜며, 파리를 쫓으며 고민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이 순례길을 무사히 완주할 수 있을까?
18일차
9.22(토)
부르고스에서 1일차 - 물갈이
우리는 짱구를 굴리고 굴리다가 결국 버스행을 선택하게 되었다. 동키 서비스를 이용해 산중턱에 있는 마을까지 가보려고 했는데, 그곳에 숙소 리뷰가 영 좋지가 않았다. 베드 버그가 100% 있다는 말에 덜덜 떨며 그렇다면 그 다음 마을로 가볼까 하다가 거기도 최악 오브 최악 이란 말에 다 뛰어넘기로 했다.
우리의 약한 체력과 견디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너무 잘 알기에 무모한 도전은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아침 6시 45분, 5유로 짜리 뷔페식, 여태껏 먹은 것들 중에 가장 성대한 조식을 먹으러 일어났다. 오빠는 전날 코골이 아저씨 두명과 복통 때문에 잠을 잘 자지 못했다. 나는 새벽에 오줌 싸러 나갔다가 그 뒤부터 잠이 오지 않아, 둘다 상태가 별로였다. 그 맛난 뷔페를 한 그릇에 끝내고,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한 젊은 남자와 중년 여성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마 엄청 폐쇄적인 동양인처럼 보였을 것이다.
버스를 타려는 무리들이 상당했다. 젊은 사람들은 우리 뿐이었고 거의 다가 50대 이상이었다. 8시 45분에 도착하기로 했던 버스는 50분쯤 왔고, 거의 10분 가량을 짐 싣고, 요금 계산하는데 소요되었다. 그렇게 출발한 버스에서는 심한 멀미가 찾아왔다. 아직도 가려면 30분이나 남았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다.
나뿐 아니라 오빠도 마찬가지였다. 간신히 도착해서, 우리는 숙소도 벤치에 앉아 머물 숙소를 물색했다. 숙박업에겐 대목인 토요일이기 때문에 저렴한 숙소들은 이미 매진이었다. 그나마 우리가 있는 거리에서 2.5km 떨어진 한 펜션이 5만원 초반대로 가장 쌌다. 일단 무료 취소가 가능하기때문에 예약을 하고, 부르고스 중심가로 가기 시작했다.
도시는 대도시 까진 아니어도 어느정도 규모가 컸고, 중심에는 대성당이 있었다. 성당에 입장료 내고 들어가는게 괜히 싫어서 한번도 안들어갔는데, 이번만큼은 들어가보기로 했다. 밖에서 보기에도 상당히 큰 성당이었다. 입구에는 인도 느낌의 한 아주머니가 작은 나무 그릇에 아이 사진을 넣어 두고, 적선을 하고 있었다. 입장료는 9유로인듯 했다. 그러나 들어가 확인해보니 순례자에게는 4.5유로였다. 사물함도 있어서 가방도 보관할 수가 있었다.
입구에 들어가니
큐레이터 설명이 들어간 전화 수화기 모양의 기계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우리는 영어 설명을 받아 들고 들어갔다. 다들 무슨 전화하는 것처럼 귀에 그 기계를 대고 있었다. 성당의 규모 만큼이나 내부의 화려함 은 상당했다. 그림도 많고 조각도 많고, 무덤도 많았다. 역대 머리급 신부들의 생전 모습을 재연한 듯한 석상이 뚜껑처럼 있고 그 밑에는 무덤인듯 보이는 돌상자가 있었다. 영어 설명 기계를 알아 듣기가 너무 어려워서 정확한 해석은 못들었지만, 여튼 방이 정말 많고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렇게 성당을 슥 지나가고, 밥을 먹으러 바로 옆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불고기 피자 비슷 하게 생긴 걸 먹었는데 슴슴하니 맛이 괜찮았다. 근데 오빠는 점점 얼굴이 핼슥해지더니 많이 힘든 거 같았다.
그 때 한껏 차려 입은 사람들이 두사람, 세사람, 조금씩 무리지어 성당 옆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뭐하는 건가 그 중심으로 찾아가보았다. 원색으로 아주 화려한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밝은 표정으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때 흰 bmw 한대가 들어오더니, 사람들이 환호하며 그 안에 타있는 사람을 맞이하였다. 안에는 한 중년 여성과 여자 아이가 내렸다. 미리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과 볼키스를 나누는데 갑자기 남자들이 또 와서, 아직 내리지 못한 사람에게 막 나오라는 듯이 손짓했다.
그 남자가 나오자 사람들은 막 환호했다. 나는 이 상황이 도대체 무언가 너무 궁금해서 나처럼 구경하고
있던 한 아저씨에게 물어보았더니, 결혼식이라고 했다. 굉장히 특이했다. 결혼식을 이 길바닥에서?
나는 핼쓱한 오빠가 생각나 다시 자리로 돌아갔고, 빨리 눕고 싶다는 오빠를 위해 숙소로 향했다.
오렌지 통신사 까지 들려 유심을 사고나니 오빠는 상태가 너무 안좋았다. 몸 전체에서 열이 굉장했고, 그렇게 침대에 누워 장장 4시간 동안을 안깨고 내리 잤다. 나는 설사에 좋은 음식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최대한 맞춰서 사왔다. 이 펜션은 조리할 수 있는 거라곤 전자렌지 뿐이라서 반조리된 감자 스프와 슴슴한 빵, 바나나, 토마토소스에 재워진 닭고기를 사왔다. 오빠는 조금 먹고는 다시 누웠다.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근처에 약국은 없었냐고 물었다.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진통제가 생각나, 그걸 먹였다. 다행히 20분 뒤에 열이 좀 내리고 통증이 많이 줄어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괴로운 밤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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