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16일차.
9.20 (목)
이동: 나헤라 ->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이동거리 : 16km
역시나 16키로는 쉽지 않았다. 우리에겐 10키로가 딱 맞는 듯 하다. 죽을둥 살둥 도착한 숙소는
아파트형 호스텔로 너무나 맘에 들었다. 방도 두개고 마루에 부엌도 있다. 세탁기도 무료로 쓸 수 있어서 우리는 이것저것 집어넣어 돌리고, 저녁 먹을 재료를 사러갔다.
오빠가 중국인이 운영하는
슈퍼가 근처에 있다고 해서 한국 라면을 사러갔다. 라면 가게, 아니 중국인 슈퍼는 메인 광장과
버스정류장이 있는 비교적 번화가에 위치해있었다. 오징어짬뽕과 너구리 중에 고민하다가 너구리
한마리를 몰고 가기로 했다. 더 살게 있을까 싶어 둘러보는데, 어린 아이 둘이 어디서 나와서
카운터에 있는 엄마에게 뭐라 뭐라 징징댔다. 엄마는 티비를 재밌게 보고 있다가 징징 대는 소리에
앙칼진 중국어로 아이들을 눌러버린다. 신기하게 중국인 슈퍼는 늘 이런 식이다. 뭔가를 조르는
아이들과 앙칼진 엄마.
그렇게 우리는 라면 두 봉지를 사들고, 다른 마트로 갔다. 이번에 간 곳은 eroski라는 스페인마트
브랜드인데, 전에 로그로뇨에서도 여기에 들린 적이 있다. 대형마트가 반가운 걸 보니, 나 역시
깨끗하고 물건 많은 프랜차이즈에 길들어져 있나보다.
오늘 저녁에는 카레가 너무나 먹고 싶었기 때문에 직원에게 물어봐서 여차저차 카레 가루를 구하고,
브로콜리 당근이 깨끗하게 씻겨 포장 된 것이 있길래 그것과 양파 하나 감자 하나를 담았다. 계란과
우유 그리고 다농에서 나온 오이키도스 라는 엄청나게 맛있는 요거트를 샀다. 1유로의 행복! 오빠는
eroski의 PB상품인 밀크 푸딩을 샀다. 전에도 사고 싶어했는데 내가 PB상품이라 말렸었다.
또 기본 쌀을 안사고, 엄청 맛나보이는 3색 안량미를 구매했다. 포장에는 쌀알이 샐러드에 살짝 올라가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에서 뭔가 힌트를 얻었어야 함을... 사실 직감했음에도 너무 먹고픈
마음에 애써 그 직감을 무시했었다...)
방으로 돌아와 살짝 불안해하는 오빠를 안심시키며 룰루랄라 요리를 시작했다. 안량미는 처음이라
어떻게 해얄지 모르겠지만 될대로 되라지 하는 마음에서 쌀을 씻고, 냄비에 부어 끓이기 시작했다.
열심히 야채를 다지고, 볶고 물을 부었다. 그리고 카레 가루를 넣으려는데 냄새가 살짝 ... 음 ... 후추
냄새가 강했다. 스페인식 카레인가보다 또 될대로 되라지로 부어버렸다. 야채를 아주 잘 익었는데
아무래도 냄새가 이상하고 심지어 역했다. 오빠를 불렀다. 오빠는 몇번 맛보더니 좀더 끓이면 쓸만할거
같다고 하는데, 나는 도저히 못 먹겠어서 그냥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옆에 있던 의자에 털썩 앉아
버렸다. 사실 조금 기대했는데 너무나 정말적이었다. 고작 카레 하나 실패했을 뿐인데 왜이리 마음이
가라앉는지... 애꿎은 오빠가 뒷수습을 하고 있었다. 전에 사둔 치킨 스탁(조미료)를 넣어 보기로 했다.
한 블럭을 넣을까 고민하다가 두 블럭을 넣었는데, 우엑... 난 진짜 못먹을 지경이 되었다. 오빠는
먹을만 하다가 불을 줄이고 좀 더 졸였다. 그리고 밥을 그릇에 담으려고 하는데, 이건 완전 푸석푸석
너무 심하게 딱딱한 상태였다. 아무리 불이 지펴, 끓이고 뜸을 들이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이런가보다
하면서 오빠는 밥과 카레를 담아 스삭 먹어버렸다. 그리고 풀이 죽은 나를 위해 직접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남은 재료를 가지고 볶음밥을 하겠다는 거였다.
밥은 여전히 딱딱했지만 나는 너무나 고마운 마음으로 열심히 씹어 삼켰다. 너무 고맙고 미안한
날이었던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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