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을 조조영화로 보면 안 되는 이유
답: 아침부터 하루 종일 생각이 나는데 썩 유쾌하질 않다.
간만에 졸린 눈을 비비며 아침부터 영화관에 출몰.
졸린 눈은 번쩍 뜨였건만, 왠일인지 어깨가 뻐근하다.
원체 잔인하고, 무섭고, 깜짝 깜짝 놀래키는 걸 못 보는 사람이라, 긴장되는 순간마다 온 근육과 신경이 열일한 모양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의 이 찝찝한 기분은 대체 뭐란 말인가?
한 지인이 영화를 어떻게 봤냐고 묻길래
주제가.. 희망적이질 않아서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힘이 쑥 빠진다고 얘기 했더랬다.
근데 나의 그 말이 별로.. 좀 상대방을 헉 하게 만드는 리뷰가 아니라서, 그 이후에 나는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길을 걸을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도대체 칸 영화제는 상을 왜 준거야?
봉준호 감독은 도대체 ‘뭔 말’이 하고 싶었던거야?
나는 ‘그 말’에 왜 발끈하고 난리냐고?
이유 없이 화만 내는 건 예의가 아니므로, 나는 차근 차근 영화 속 장면들을 떠올려 본다.
일단 케릭터 중 영 공감가는 인물이 없었던 데에서 쉽게 욕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 관한 일화래든가 부수적인 정보를 전혀 찾아보지 않아서 단정하긴 이르지만, 이 영화는 ‘계획도 없이 살던 반지하살이 일가족이 부잣집에 빌붙어 사는 이야기 어때? 그 아버지는 지하 벙커에서 영원히 기생충처럼 살게 되고 말이야.’란 어떤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자극적인 사건이 먼저 시작되고, 오락성만 있으면 안 되니 거기에 하나 하나 의미가 붙게 된 것이다. 각 인물들은 꼭두각시처럼 이리저리 팔 다리가 휘청거리는 모습...을 나는 영화에서 발견했던 거 같다.
각 인물들의 진정성? 그런 걸 기대하려거든 채널을 돌렸어야지.
여기선 상징성이지, 상징성.
그래 내가 괜히 애꿎은 데를 와서 엉뚱한 걸 바랬나보다.
여기 나오는 인물의 대사조차도 ‘상징성’을 그렇게 연발하는데 말이다.
그래, 좋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드라마’로 보지 않고, ‘상징만이 가득한 움직이는 시’ 정도로 다시 보련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영화는 영화다. 관객은 계속해서 인물을 연속성을 가지고 보게 되어있다.
각 행마다 다른 상징을 가지고 있다고 보긴 힘든 것이다. 그러다보면 그 인물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최후의 순간까지 쫓다가 어느 정도는 ‘나’를 투영해서 보게 되어있다. 그래서 ‘나는 과연 송강호네나 이선균네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란 생각도 들 것 같다.
이선균네 가족은 부자지만, 착하다(고 한다). 아니 극중 대사에 따르면, 부자기 때문에 착하다. 부족한 것이 없으니 자식들은 구김살이 없다. 돈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송강호 가족은 믿고 있다.
그럴듯한 얘기고, 실제로도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그래서 영화에 나오는 기생충 같은 존재들은 사기를 치는 중에도 착한 부자들에 대한 고마움을 잃지 않는다.
이런 부자의 모습은 사실 선하다기 보단, ‘갑질이 덜한’모습에 가깝다. 워낙 가진 자들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한 사회 속에서는 이런 갑질 안 하는 부자가 신선할 수도 있을 거 같다. 감독도 ‘부자라고 다 못된 건 아니에요’란 말을 하고 싶었던 거 같다.
이분법에 벗어나고 싶어 나름대로의 신선함을 추구했지만 이상하게도 그닥 새로울 건 없다. 이미 드라마에서도 많이 나왔질 않는가.
워낙 못되쳐먹은 재벌들이 많이 나와 묻혀서 그렇지.
어쨌든 이선균, 조여정네 가족은 그냥 무난하다. 자꾸 조여정한테 심플하니, 어쩌니 하면서 독특한 케릭터를 구축하려고 했으나 결국은 자식들 위하는 엄마이자 돈 좀 있는 집 사모님의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상징성 개념으로 이 영화를 다시 보자.
송강호네는 도대체 누구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단 말인가?
초반에 사기를 쳐서 남의 자리를 뺐은 것은 참으로 못된 짓이지만, 사실 맡은 일에 태만했던 것도 아닌데... 기생충이란 말이 너무 과하지 않나?
그렇다면 이들보다 더한, 지하벙커에 아예 뿌리를 내리고 있던 전 가정부 부부를 기생충으로 봐야하는건가? 그럼 영화에서 말하는 기생충은 우리 사회에서 도대체 누구로 봐야하는 건지.. 이 고민에 대해서 답을 내리질 못하겠다.
어쩌면 감독은 특정 대상을 떠올리지 않게 하려는 의도를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어떤 사람들이 있거나.
그들은 충분히 일할 수 있는 여건이지만 반지하 집에서 피자 상자만 조립하고 있었고, 미래에 대한 계획은 없지만 자존감도 높고 특유의 배짱이 있었다. 우리가 흔히 이미지를 그리는 사회적 약자와는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약자는 선하다’라는 어떤 선입견을 깨게 만들어, 결국 반지하 집에 빗물이 가득 차는 상황에도, 그들을 동정하지 않도록 만든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기분이 나빴던 이유는 ‘선입견을 깨기 위한 선입견’이었으리라. 장치와 상징 뿐인 무대 위에서 주제가 부재한 연극. 지극히 개인적인 내 생각으론...감독이 이 소재에 대해서도 굉장히 가벼워보였다. 누군가의 상처와 고통을 얘기하면서 게임을 한더거나, 농담을 하는 느낌이랄까?
영화에서 어떤 보편적인 주제의식을 가지고, 송강호네 가족 혹은 지하벙커 부부를 움직였더라면, 갑자기 식칼을 쥐어주고 사람을 마구잡이로 찌르거나, 사람을 뻥 차서 계단을 구르게 하는 일보단, 차라리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럼 칸에선 외면받았으려나?